강철같은 삶
①김승환 충북대 교수
"우리 민족사 전체로 볼 때 단재만큼 우리민족의 정신과 영혼 바로 세우려고 노력한 분은 많지 않습니다. 또 민족의 미래를 제시해주고, 횃불 역할
아나키즘은 독립운동 위한 선택
②박걸순 충북대 교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독립운동 노선은 계몽운동이었다. 신문과 잡지를 발행해 국민 계몽운동을 시작했고, 신민회 활동을 하면서 해외 망명 독립운동 기지 건설, 무장투쟁으로 변화했다.
절망의 시대, 역사로 독립을 부르짖다
③허원 서원대 교수
단재 신채호 선생은 대동제국사 서언에서 "국사가 있어야 국민이 애조심(조상을 사랑하는 마음), 애국심, 독립심, 진취심이 있을지라 …(중략) 차와 밥을 먹지 않더라도 국사는 없어서는 안되고, 의복을 벗을 지라
독립정신 일깨운 언론인
④박정규 언론학자
단재는 평생을 언론과 함께 산 언론인이었다. 그의 글에는 오로지 나라와 민족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문학은 국민의 혼이자 나침반
⑤김주현 경북대 교수
독립운동가나 역사학자, 언론인으로서의 단재는 진작부터 관심을 받았지만 문학 연구는 뒤늦게 출발한 측면이 있다.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72년 단재 신채호 전집이 나오면서부터. 북한에서 발간된 '룡과 룡의 대격전'이라
단재 동상을 건립하다
⑥도종환 국회의원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비타협주의자, 고집불통 등의 이미지에 둘러싸여 사후를 살았다. 선생이 복권된 것은 한국정부가 해금조치를 한 1988년 전후. 충북에서 처음 단재 선생을 기념하는 움직임이 태동한 것은 해방
단재 연구 20년...
⑦최옥산 북경대외경제무역대학 교수
1910년 4월 단재 신채호는 중국 망명길에 나선다. 1928년 대만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뒤 1936년 2월 중국 다롄의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기까지 26년간의 망명 생활의 대부분은 중국에서 보냈다. 중국에서 단재는 오로지 조국 독립만을 위한 일념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뛰어난 족적
칼날 같던 지성
⑧며느리 이덕남
"신랑 하나 좋아서 시집 와서 보니 신채호 선생 아들이더군요. 이혼하려고 도망도 다녔지만 범상치 않은 아들에게 23살에 시집와 지금 72살이 되었네요. 은행원인 제 남편은 1991년 돌아가셨지만 잘 생기고 깨끗한 분 이었어요. 아버지 고집을 물려받았지요. 내가 돈이 없다고 하면 '마누라가 도둑놈 만든다, (은행원이) 돈
표준연보 제작 절실
⑨김하돈 시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국내 유적지를 답사했던 김하돈 시인은 단재 연구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유소년기와 청소년기를 꼽았다. '서울이나 국외 활동 시기에 비
순국 80주기 어떻게 준비할까
⑩전문가 좌담회
올해로 기념사업 20주년을 맞은 충북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의 고민은 깊다. 2016년이면 근대사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단재 선생의 순국 80주기가 되지만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재를 지역의 인물이 아닌 한국의 인물로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해마다 거듭되는 이유다. 기념사업의 전국화, 대중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중단됐던 '단재 영당 및 묘소 종합정비 기본계획'이 재개된다면 단재 기념사업의 새로
중부매일 기획 기사
시놉시스
신채호 연보
신채호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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