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를 말하다는 인터렉티브 디자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최적의 화면을 위해 볼륨버튼을 눌러 볼륨조절을 해주세요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거나 버튼을 누르면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터치 드레그를 아래로 내리면 페이지가 넘어갑니다.

시작하기

Logo image for print version http://interactive.jbnews.com
처음으로

"우리 민족사 전체로 볼 때 단재만큼 우리민족의 정신과 영혼을 바로 세우려고 노력한 분은 많지 않습니다. 또 민족의 미래를 제시해주고, 횃불 역할을 하고, 자기를 태워 다 소진하셨습니다. 광복 70년이 됐지만 민족의 주체 세우지 못한 부끄러운 후손들에게 선생의 삶은 큰 교훈은 남겨주고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우리민족의 큰 스승이고 거룩한 민족의 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의로웠지만 외로웠다. 1936년 단재는 차디찬 이국 땅 감옥에서 오랜 수감생활 끝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생전의 삶 역시 눈물과 비탄의 일생이었습니다. 고집과 절대적 비타협 속에 투쟁의 나날을 보냈고 하루도 발을 뻗고 보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고난과 고통에 사시다가 최후에 8년 감옥에서 지내셨는데 죽는날까지 민족과 겨레를 위해 온 영혼을 불태우며 조선사를 쓰셨습니다. 강철같은 삶을 사셨지만 죽어서도 편하지는 못했죠."

선생의 민족주의 사상이 역사에 복권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독립운동가 추앙 작업이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였다. 단재가 완전히 복권된 것은 1988년 전후 한국정부가 해금조치를 하면서부터다. 김승환 교수는 "오랜 세월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비타협주의자, 고집불통 등이 단재를 붙들고 있었지만 이 점이야말로 단재의 빛나는 부분"이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방법도 택했을 단재의 사상은 절대주의"라고 설명했다. 그는 공산주의보다 국가나 제도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가 조선해방의 방법으로 타당하다는 믿음이 단재사상의 핵심이라고 역설했다.

기사보기기사 전문 보기



처음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독립운동 노선은 계몽운동이었다. 신문과 잡지를 발행해 국민 계몽운동을 시작했고, 신민회 활동을 하면서 해외 망명 독립운동 기지 건설, 무장투쟁으로 변화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계몽운동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나라가 망하자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선생이 민중 중심의 역사서술을 하며 무장투쟁과 의열투쟁론을 주장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선생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도 민족투쟁을 보다 강력하고 분명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박걸순 교수(충북대 사학)는 단재 신채호의 독립투쟁에서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론인, 사학자, 문학인으로서의 활동 역시 조국 독립을 위한 일환이었으며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독립운동노선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더욱 선연하게 한 확실한 이데올로기였다고 평가했다.

정규전으로는 일제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단재는 무장투쟁의 방법으로 의열투쟁을 채택한다.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은 이를 이론화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직접 단재를 뽑게 되고, 단재에 의해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박걸순 교수는 "단재의 무장투쟁론을 돈키호테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계몽적 차원으로는 독립을 이뤄낼 수 없기 때문에 민중이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의열투쟁으로 전환했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의열투쟁이야 말로 소수인원이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할 수 있는, 시대적으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사보기기사 전문 보기



처음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은 대동제국사 서언에서 "국사가 있어야 국민이 애조심(조상을 사랑하는 마음), 애국심, 독립심, 진취심이 있을지라 …(중략) 차와 밥을 먹지 않더라도 국사는 없어서는 안되고, 의복을 벗을 지라도 국사는 없어서는 안된다. …(중략) 국사가 없으면 국민이 무정신, 무사상의 국민이 되어 금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서원대 역사교육학과 허 원 교수가 단재 선생의 여러 글 중 가장 가슴속에 새기는 글 중 하나다. 허 교수는 단재 선생을 '절망과 저항의 시대역사가'라며 "선생에게 역사란 백성의 의식주(衣食住)요, 민족의 혼(魂)이었다"고 했다.

단재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애국심을 강조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어떤 사랑보다 애국이 강하기 때문에 진정한 애국자는 애인, 술, 담배를 더 사랑해도 안 된다며 자신도 담배를 끊었다. 단재는 애국심을 키워줄 수 있는 것이 역사라고 판단했다. 국사가 없으면 백성에게 정신과 사상이 없다고 생각했다. 역사 가운데서도 이런 정신을 고취시킬 수 있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연구했다.

단재는 기존 전통사학과 다른 근대적 역사학, 근대 민족주의 사학을 실증하고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기초를 놓았다. 사건이나 사실 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기원부터 발전과정을 고구려, 부여, 즉 중국 만주지역으로 큰 틀을 잡았다. 중국 사료를 폭넓게 읽으면서 언어학, 지리학, 한문학 등 여러 관점에서 보고 중국 사료의 오류를 찾아내고 비판했다. 단재 선생은 한말 역사가인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계도 찾아내 이를 비판하고 극복한 대학자다.

기사보기기사 전문 보기



처음으로

단재는 평생을 언론과 함께 산 언론인이었다. 그의 글에는 오로지 나라와 민족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대의명분이 있었다. 단재 선생은 신문에 주로 논설을 쓰면서 특이할 정도로 가사체 형식의 시나 율격이 있는 노래를 넣었다. 대중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단재 선생의 시가는 한시를 포함해 26수가 알려져 있는데 25수에 가까운 단재 선생의 시를 박정규 교수가 새롭게 찾아냈다. 논설 쓰는 사람 중에 시가를 쓴 것은 단재밖에 없었다.

글을 쓰면서도 단재는 '어떻게 하면 국민을 계몽시킬 것인가'에 골몰했다. 시가를 써서 설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논설 안에 시를 넣어 시로 감정을 표현했다. 예를 들면 '뻐국새'라는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4구를 이어가면서 여러 분야의 제도 개선을 시가체로 요구했다. 황성신문의 '멕시코로 가려는 동포야'에선 시를 통해 가지 말 것을 훈계하기도 했다. 국민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고 설득을 하기위해 시가체를 많이 사용했다.

단재는 평생이 기자였다. 직접 발행도 하고 자신이 속한 언론에 글도 쓰고, 중국의 신문에 까지 투고했다. 돌아가실 때까지 그의 수첩에는 한시와 시가 빼곡히 적혀있었다고 한다. 그의 논설에선 사상의 변환도 읽혀진다. 황성신문에 입사해 논설을 지을 때는 성리학적인 사고방식이 컸지만 후에는 양개초를 뛰어넘는 사상가다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단재는 기자로서 자긍심이 굉장히 컸고 국민들을 계몽시켜서 조국을 알리고, 국가의 왜곡된 역사를 타파하기 위해 힘썼다. 역사도 기자로서 해석했다. 1908년 쓰신 독사신론도 전부 논설이었다. 역사논설이다. 기자적 관점에서 역사를 쓰고, 근대사학을 해석했다.

기사보기기사 전문 보기



처음으로

독립운동가나 역사학자, 언론인으로서의 단재는 진작부터 관심을 받았지만 문학 연구는 뒤늦게 출발한 측면이 있다.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72년 단재 신채호 전집이 나오면서부터. 북한에서 발간된 '룡과 룡의 대격전'이라는 신채호 유고집이 일본을 통해 들어오면서 '꿈하늘', '백세노승의 미인담' 등의 작품이 알려지고 1977년 형설출판사에서 '개정판 단재 신채호전집'이 나온다. 대한매일신보 논설이나 각종 논설을 찾아낸 전집까지 나오면서 단재의 문학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된다.

단재의 시는 한시와 시조를 비롯해 가사형태도 있고 오늘날 자유시에 가까운 것도 있을 만큼 형태가 다양하다. 개인적 소회를 노래했다거나 애국적인 내용을 주로 썼다. 단재의 산문 문학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애국적 전기와 연의소설, 알레고리다. 애국 전기물인 을지문덕전은 단행본이 있고, 이순신전과 최도통전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했다. 이순신전은 신문을 필사해 유통될 정도로 당시 독자층이 두터웠고, 최도통전도 미국 소년소회가 500부를 유인본으로 배부하기도 했다. 모두 애국정신을 함양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쓰였다.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한 이순신, 요동 정벌을 통해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려 한 최도통전 등 모두 국가와 국토, 나라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를 이야기로 만든 단재의 연의소설로는 '유화전'이 있으며, 알레고리에 속하는 작품은 '꿈하늘'과 '용과 용의 대격전'이라는 작품이 있다..

단재의 문학적 글쓰기 가운데 주목할 작품은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던 '천희당시화'다. '천희당시화'는 단재의 문학에 대한 입장, 가치, 문학적 태도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문학론이다. 시론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론 문학론이다. 단재는 문학을 '국민의 혼', '나침반'이라고 표현했다. 예를 들어 소설이라는 것이 국민을 강한 데로 이끌면 국민이 강해지고 약한 데로 이끌면 국민이 약해지며 바른 데로 이끌면 바른 데로 약한 데로 이끌면 국민이 나약해진다는 것이다. 단재는 장르를 위한 글쓰기를 했다기보다 애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광범위한 계몽적 글쓰기를 했다.

기사보기기사 전문 보기



처음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비타협주의자, 고집불통 등의 이미지에 둘러싸여 사후를 살았다. 선생이 복권된 것은 한국정부가 해금조치를 한 1988년 전후. 충북에서 처음 단재 선생을 기념하는 움직임이 태동한 것은 해방 50년을 맞은 1995년 동상 건립이 추진되면서부터다. 당시 동상건립추진위원장을 맡은 사람이 국회의원이 된 도종환 시인이다.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건립한 단재 선생 동상은 청주예술의전당 앞에 세워졌다.

단재 동상 건립을 추진한 것은 1995년이다. 해방 50년을 맞은 1995년 그와 지역의 몇몇 인사들이 모였다. 3·1 독립선언 33인 민족대표인 정춘수는 국가에서 훈‧포장도 하지 않고 독립기념관조차 친일로 기록하는데 청주의 삼일공원에 버젓이 동상이 서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어째서 해방 50년이 되도록 단재 선생의 동상은 없는가"라는 생각들이 모여 민간 차원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 세우기가 결정된다.

목표 성금은 청주, 청원을 뛰어넘어 전국의 1만명이 참가해 1만원씩 모으기로 했다. 남녀노소, 학생, 일반인 구분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단재를 알려 1억 여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동상 제작은 안규철 선생이 맡았다. 높은 좌대위에 올려다보는 동상이 아닌 낮은 좌대 위에 책 한권 들고 조용히 서있는 촛불 형상의 동상이 탄생했다. 어린이들과 시민들에게 가까이 있는 형상으로 디자인했다. 1996년 12월 18일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도 의원은 "단재가 한때 아나키스트인 적은 있으나 독립운동의 일환이었고 당시 아나키스트 국제연맹에는 중국과 대만은 물론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일본인들도 있었다"며 "단순하게 현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 잃은 상황에서 통치 주체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말하자면 식민지 지배를 하는 총독부라든가 일본 제국주의, 정신적 지주인 천황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단재가 민족운동적 관점에서 참여한 것을 막연한 무정부주의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사보기기사 전문 보기



처음으로

1910년 4월 단재 신채호는 중국 망명길에 나선다. 1928년 대만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뒤 1936년 2월 중국 다롄의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기까지 26년간의 망명 생활의 대부분은 중국에서 보냈다. 중국에서 단재는 오로지 조국 독립만을 위한 일념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뛰어난 족적을 남겼다. 지금도 선생에게 따라붙는 역사학자, 문학인, 언론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의 존칭은 중국에서 보낸 치열한 삶의 결과물이다.

평생 따라붙어 다니는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고 선생은 상하이와 지안, 베이징을 오가며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중국에서 지독한 가난과 민족 간 파벌싸움 등 숱한 좌절을 겪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조국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인생의 로맨스도 중국에서의 일이다. 1920년 단재는 이회영 선생 부인의 소개로 신식여성 박자혜 여사를 만난다. 1921년 맏아들 수범이 태어나는 기쁨 속에 사랑의 보금자리를 진스팡제에서 챠오떠우 후통으로 옮긴다. 이곳은 단재 선생의 집필 활동 정점에 있는 장소다.

하지만 단재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다.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다시 따헤 이후 후통으로 옮겨오면서 부인 박자혜 여사와 장남 수범씨를 고국으로 돌려보낸다. 훗날 아들 수범 씨가 아버지 단재를 다시 본 건 한줌의 재가 되어버린 뤼순 감옥에서다. 중국 북경대외경제무역대학 최옥산 교수는 단재 선생의 중국 생활에 대해 알고 있는 중국내 몇 안 되는 단재 문학 연구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최옥산 교수의 전공은 문학이다. 단재 연구도 문학으로만 접근했다. 현재 중국 문학계에서 단재연구는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서만 진행되고 있다. 단재 자체가 문, 사, 철을 넘나드는 백과전서식 인물이기에 외국인으로서 단재 읽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최 교수가 2003년 논문을 쓸 당시보다 중국내 단재에 대한 관심은 훨씬 높아졌지만 해외 행적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단재 정신을 기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재를 알리고 검증하지 못한 유적, 사료, 인물에 관한 논증 작업이 절실하다.

기사보기기사 전문 보기



처음으로

"신랑 하나 좋아서 시집 와서 보니 신채호 선생 아들이더군요. 이혼하려고 도망도 다녔지만 범상치 않은 아들에게 23살에 시집와 지금 72살이 되었네요. 은행원인 제 남편은 1991년 돌아가셨지만 잘 생기고 깨끗한 분 이었어요. 아버지 고집을 물려받았지요. 내가 돈이 없다고 하면 '마누라가 도둑놈 만든다, (은행원이) 돈을 돈으로 보면 감옥이 자기 집이다'하셨죠. 돈을 돌로 본 은행원이 내 남편이에요"

"단재정신은 애국심이에요. 애국의 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 어른의 사랑은 오직 애국뿐이었다고 전해 듣고 책으로 느끼고 있어요. 애국이라는 게 어떻게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를 봐도 나라를 느꼈을까. 절대적으로 애국해야한다고 가르치고, 그 어른의 정신이 몸에 배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단재정신이고, 시대정신이 아닐까요. 단재는 칼날 같은 지성을 가진 분이에요. 과거엔 그래도 내가 만난 언론인들 중에 정통적으로 단재 정신을 배우려는 언론인이 있었는데 요새 언론인들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여사의 말이다. 이 여사는 "어른들이 망명을 해서 초개같이 자기 몸을 다 던졌는데 가족이 어디 있느냐,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조선민사령이 바로 애국지사를 잡는 족쇄인데 그놈들 밑에서 살지 않겠다고 호적신고를 안 한 것이 훗날 무국적자가 되고 말았다"고 했다. 단재 선생 국적회복을 위해 싸우다 분하고 원통해 위암말기 판정을 받기도 했다. 급기야 2004년 딸의 사업장이 있는 베이징으로 왔지만 끈질긴 투쟁 끝에 다른 62분 선열의 호적을 찾은 것이 그나마 큰 위안이다. 단재 선생은 2009년 국적을 회복했다

기사보기기사 전문 보기



처음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의 국내 유적지를 답사했던 김하돈 시인은 단재 연구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유소년기와 청소년기를 꼽았다. '서울이나 국외 활동 시기에 비해 유소년기와 청소년기에 이르는 초기 전기적 국면에 대한 연구 성과물이 의외로 너무 혼란스럽고 산만하다'는 것이다. 표준연보 제작 필요성은 2014 단재 학술심포지엄에서 '단재 신채호의 국내 유적지 답사 보고'를 하면서 처음 제기했다.

국내 유적지 답사를 하면서 들었던 가장 큰 의문은 통일되지 않은 설명과 연보였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펴낸 '단재 신채호 전집'(2008)과 단재 사이버기념관(www.danjae.or.kr), 단재 신채호 순국 77주년 헌정시집 '광장을 꿈꾸다'에 수록된 연보가 각각 달랐다. 충북에서 단재 기념사업을 추진한 지 올해로 20년. 김 시인은 더 늦기 전에 표준연보를 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한 몇 가지 과제도 제시했다. 첫째, 단재 신채호가 왜 대전에서 출생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둘째, 대전에서 충북 귀래리로 이주한 시기와 목적을 밝혀내야 한다. 셋째, 귀래리 조부 묘소를 비롯해 추정리 부친 묘소, 첫째 부인과 함께 살았던 서울 삼청동 집 등의 위치를 찾는 일도 국내 유적지 답사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내 유적지를 답사한 김하돈 시인은 단재 선생 기념사업은 지역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족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인물로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채 서른 해도 안 되는 국내 생활을 답사하면서 참담하게도 그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알았다. 충북의 단재, 대전의 단재가 아니라 독립운동가, 사학자, 문학가, 언론인으로서 선생의 공적과 위업을 알리고 계승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면 과제인 유·청소년기 행적에 대한 연구, 즉 표준연보 제작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사보기기사 전문 보기



처음으로

올해로 기념사업 20주년을 맞은 충북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의 고민은 깊다. 2016년이면 근대사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단재 선생의 순국 80주기가 되지만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재를 지역의 인물이 아닌 한국의 인물로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해마다 거듭되는 이유다. 기념사업의 전국화, 대중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중단됐던 '단재 영당 및 묘소 종합정비 기본계획'이 재개된다면 단재 기념사업의 새로운 전개가 가능할 것이라는 제언도 나왔다. 단재를 연구하거나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내년 단재 순국 80주기를 앞두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짚었다.

기사보기기사 전문 보기



처음으로


Staff
PM 김정미
취재 김정미·박익규·김용수(사진)
도움 박정규 초대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장(전 청주대 교수), 도종환 국회의원, 김승환 충북대 국어교육과 교수,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 허원 서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김주현 경북대 국어국문과 교수, 윤석위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공동대표, 김하돈 충북민족문학작가회의 시인, 최옥산 중국 북경대외경제무역대학 교수, 이덕남 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원종문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집행위원들
개발 LEE&COMPANY


ⓒ 2015 JBnews.com

처음으로
계속 보기
숨김텍스트 보기
© 중부매일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