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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단양군이 충주댐 수몰로 인해 군청 소재지를 신단양으로 이주한지 꼭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군민들의 애환이 서린 이주 3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사업이 펼쳐졌지만 반가움 못지않게 아쉬움도 교차하고 있다.

오래된 삶의 터전을 등지고 신단양으로 이주한지 어느덧 30년. 떠난 사람은 두고 온 고향을 추억하느라 섭섭하고, 끝내 남아 삶의 터전을 지키고 있는 주민들은 여전히 녹록치 않은 삶 때문에 서럽다.

1985년 착공 7년 4개월 만에 충주 다목적댐이 완공되면서 남한강 하류지역 물 걱정은 해소된 반면 2천만㎡가 댐 저수구역으로 편입된 단양군은 전체 인구의 20%(2천600여 가구, 1만2천700여 명)가 집단 이주를 해야 했다.

군청 소재지까지 옮겨야 했음에도 당시 정치현실은 반대 목소리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주 당시 6만3천명이었던 단양군 인구는 현재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 단양군은 옛 단양 살리기에 적극 나서며 뉴타운을 조성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장밋빛 청사진 못지않게 가려진 그늘을 주목해 달라 호소한다. 이런 이유로, 신단양 이주 30년 기념사업은 향수와 추억을 회상하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중부매일은 새로운 미래 성장 동력 찾기에 나선 단양군과 옛 단양 활성화를 염원하는 군민들의 기대를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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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집과 2층짜리 점포는 주황색 굴삭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았다. 번화했고, 아담했건만 670년 전통을 가진 단양군청 소재지는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충주호라는 내륙의 바다에 잠겨버렸다. 1985년 옛 단양에서 벌어진 일이다.

충주댐 건설은 중부내륙지방의 지도를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유역면적만 6천648㎢, 전국토의 7%, 저수량 27억5천만 톤. 1985년 10월 17일 충주다목적댐이 준공되면서 한강유역권의 용수난도 더불어 해결됐다. 시절이 냉혹했으므로 반대 목소리는 엄두도 못 냈다.

30년이 지난 2015년. 수몰민의 96%가 이주하고 남은 옛 단양은 상전벽해를 이룬 신단양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주거지 1천333필지, 업무용지 23필지, 상업지 231필지 등 32만5천 평에 건설된 신단양이 멋진 호반도시의 밑그림을 완성하고 있을 때, 단성면 옛 단양의 시계는 멈춰버렸다.

한 때 8만 명에 달했던 단양군 인구는 이주 당시 6만2천965명이었지만 2014년 3만948명으로 반토막 났고, 54개교 1만6천296명이었던 학생 수는 35개교 2천850명으로 82%나 감소했다. 고향이 사라진 신단양 이주민, 수몰선 밖에서 옛 단양을 지키고 있는 잔여지역 주민 모두 변해버린 단양이 애처롭기는 마찬가지다.

채송화가 촘촘히 둘러싸고 있던 고향의 장독대는 충주댐에 물이 차던 그 순간, 주민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주 30년을 앞두고 있던 4월의 어느 날, 다시 봄날이 왔건만 오래전 밝은 미래를 약속했던 충주호의 물줄기는 가뭄에 바짝 말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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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상류를 막은 콘크리트 옹벽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주민들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마지막 공정인 충주댐의 발전기 설치 작업이 본격화되자 1984년 11월 댐 수문이 막혔다. 담수가 시작되면서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남한강 상류지역 1시 3군 2읍 11면 101리·동 주민의 가슴에도 시름이 가득 찼다.

군소재지인 읍내가 호수 속에 가라앉게 된 단양군은 27개 관청과 읍 전체를 신단양 단지에 이주해야 했는데, 단양군 내 수몰지구는 단양과 매포 등 2개 읍, 적성·대강·가곡 등 3개면 553만7천여㎡(167만5천평)에 달했다. 1985년 5월 20일. 마침내 신단양에 새로운 군청사가 문을 열고 매포읍 도전리와 상진리 일대 탁 트인 구릉에 ‘약속의 땅’ 신단양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댐 완공이 계획보다 1년이나 앞당겨지면서 옛 단양에서 신단양으로의 이주는 그때까지도 ‘현재진행형’이었다. 이주가 완료된 것은 그해 7월 10일. 수몰세대(2천565세대)보다 실제 이주세대(2천684세대)가 더 많았고 수몰선 밖에 거주하던 주민도 신단양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며 고향을 등졌다.

단양읍 중심부가 수몰되면서 수몰선 밖에 거주하던 상방리와 하방리 일부 주민은 걱정이 더 깊어졌다. 수몰 면적에 비해 수몰 세대수(84.5%)나 수몰 인구수(80.4%), 수몰 건물(82.8%)이 80%에 달해 읍 시가지로 그 중심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수몰민은 국가에서 보상비를 지급했지만, 잔여 주민에게는 보상이 없어 생활 대책이 막연했다. 떠난 사람보다 폐허가 돼 버린 고향 땅을 마주해야 했던 잔여 주민은 더 자주, 더 오랫동안 마음이 쓰라렸다.

상방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위춘자(89), 위춘옥(86) 할머니 자매는 “산은 그대로 인데 마을도, 개울물도 너무 많이 변해 섭섭하다”고 했다. 할머니들이 꾸덕하게 말린 메주와 마른 고추, 달궈진 숯에 소금물을 부어 간장을 끓이던 날, 상방리 골목은 모처럼 구수한 추억을 머금었다.

위춘옥 할머니 인터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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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단양 사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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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면의 어제와 오늘을 지켜본 하방리 충혼탑 바로 아래에는 옛단양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한 수몰이주기념관이 있다. 풍년을 기원하는 영농캠페인에 각 읍·면 주민들이 나와 새마을 사업을 벌이는 모습부터 교련복을 입고 불조심 캠페인을 벌이는 단양중학교와 단양공고 학생들의 모습까지 1978년 촬영한 옛단양 하방리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단양역 앞에서 초록색 새마을 모자를 눌러쓰고 쓰레기를 줍고 있는 주민들, 지금은 추억 속에나 남아 있는 이화다방과 반도이용원, 금강사진관을 비롯해 칼국수를 팔았던 원주집과 고향집 모습도 사진에 담겼다.

이장호 감독이 1974년 발표한 영화 '별들의 고향'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삼양극장 앞으로 제8차 안보정세보고회에 참석하기 위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서 있는 주민들, 단양경찰서 앞에서 여유 있게 도로를 거닐고 있는 한복차림의 노인, 전교생이 1천400명이 넘을 정도로 제법 학생 수가 많았던 옛단양 초등학교의 수몰 전 모습 또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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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위태롭게 서 있는 낡은 건물을 가리키며 단양군의회 의원을 지낸 주민 조태근(60)씨는 하숙·자취생이 넘쳐났던 집이라고 설명했다. 1만 명이 넘는 주민이 생활했던 단양읍 소재지에는 단양초, 단양중, 단양여중과 단양여고, 단양공업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교통이 좋지 않아 하숙과 자취를 하는 형제, 자매가 많았다.

장날이면 상방리 시장가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뤘건만 30년이 지난 지금, ‘구단양’으로 불리는 단성면 일대는 쇠락의 수렁에서 좀처럼 헤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단성생활체육공원과 인접한 상가지역 9개동 주민은 고향 산천이 변해서 한 번 울고, 상가가 하천구역에 편입돼 있어 이중으로 모진 시절을 견디고 있다.

간판을 찾아보기도 어려운 하천변 상가들. 대부분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상가들을 통해 옛 단양의 상권 몰락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태근씨의 식당도 그곳에 있었다. 수자원공사로부터 하천점용허가를 받아 영업하다보니 재산권 행사는 물론이고 건물에 대한 증개축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수자원공사는 1990년 일부 상가의 침수 피해 사례를 들며 제척이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옛 단양 활성화를 위해서는 수공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곳 주민과 단양군의 일관된 입장이다.

주민들은 “군청 소재지가 이전해 삶의 터전이 망가진 것도 서러운데 하천구역에 편입돼 생활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며 “옛 단양 주민의 생계가 걸린 문제인 만큼 상가 부지를 하천구역에서 제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단양 이주 30년, 시간이 멈춰버린 상·하방리의 남은 주민에겐 지나온 세월이 서러운 오월이다.

조태근씨 인터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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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산성은 서기 550년 전후로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전진기지로 축성한 단양의 대표적 역사자원이지만, 2001년 제천-단양-영주-안동 구간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죽령터널이 뚫리며 경관이 훼손됐다.

현대인의 편리를 앞세운 논리는 단성면 옛단양 주민들에게 두 번의 아픔을 안겼다. 역사학자들은 아래로는 충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水沒), 위로는 적성산성을 관통하는 산상 고속도로에 따른 산몰(山歿)을 겪었다고 표현했다. 지금도 많은 역사학자들은 역사문화경관을 무시한 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신라문화유산의 걸작인 적성산성을 영구적으로 훼절시킨 ‘문화 파괴’ 행위라고 지적한다.

적성산성은 신라의 영역인 지금의 경북 안동에서 죽령을 넘어 남한강을 건너기 전 강 연안의 성재산 정상 부분에 축성됐다. 이곳은 험한 지리와 전략적으로도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사방을 정찰할 수 있는 요충지다. 신라가 죽령의 길을 개척하고 진흥왕 때 이르러 서기 550년 전후 강력한 북진정책에 따라 이곳 단양지방을 완전히 점령하고 고구려 경략(經略)의 전초기지로 축성했다.

하지만 1989년 처음 건설되기 시작한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가면서 성재산의 산허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향토사학자인 윤수경 전 단양군의회 의장은 “적성산성 서북쪽 한쪽이 싹둑 잘리면서 한민족의 역사 한 귀퉁이도 함께 잘려나간 듯 가슴 아픈 상황이 됐다”고 아쉬워 했다.

윤수경 향토사학자 인터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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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의 상징적 낙후 지역으로 꼽혔던 단성면 상방리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허름한 동네 담벼락이 예술가들의 캔버스가 된 뒤, 상방리는 단양의 대표적 벽화마을로 불리고 있다.

상방리 벽화골목은 상방 삼거리 시외버스 간이정류장에서 하방리 체육공원까지 거리에 조성됐다. 폭 1.5m, 길이 300m가 전부지만 벽화골목의 벽화를 보겠다고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늘어나면서 동네 분위기도 활력을 되찾고 있다.

90여 가구 170여 명이 모여 사는 이 마을은 1985년 충주댐으로 인해 수몰되기 전,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왕래했던 단양의 명동거리였다. 하숙·자취를 하는 학생과 공무원이 많아 대부분 하숙, 자취집이었는데 지금도 몇몇 오래된 집은 빈 방이 늘어선 별채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상방 쌀 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유순옥(80) 할머니 부부가 상방리의 산 증인이다. 양념 몇 가지, 과자 몇 봉지, 생필품 약간을 갖춰놓은 소박한 쌀 상회 앞 평상은 마을 주민들이 애용하는 마실 장소다.

상방리 주민들은 벽화골목을 통해 영화롭던 옛 단양을 추억하게 됐다. 단양미협 소속 작가들은 허름한 대문을 수리해 색을 입히고, 부식된 담벼락에 페인트칠을 하면서 주민들의 빛 바랜 아픔을 추억으로 바꿔 놓았다.

작가들은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그 그림은 주민들에게 큰 격려가 됐다. 번화했던 단양의 옛 명동거리가 새로운 옷을 갈아입던 순간, 이주 대열에서 빠져 오랜 기간 쓸쓸히 고향을 지켰던 주민들은 다시 한 번 ‘상방리의 봄’을 꿈꾸기 시작했다.

김순희 단양미술협회장 인터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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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은 침체된 옛 단양의 시끌벅적했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2010년 ‘뉴타운’ 조성 사업을 추진했다. 젊은 인력을 유치해 고령의 농업인을 대신하고, 맞춤형 종합 지원으로 돈 버는 농업의 핵심 주체로 육성하는 야심찬 밑그림도 그렸다.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살맛나는 농업을 만들어 잘 사는, 활기 넘치는 옛 단양 부활의 장밋빛 청사진을 그린 것이다.

뉴타운은 단성면 중방리 산9번지 일원 13만4천25㎡에 단독 66가구와 테라스하우스 3개동 9가구 등 모두 75가구로 조성됐다. 분양률 100%. 단양군에서는 원활한 분양을 위해 1가구당 5천만원(연이율 3%, 5년 거치 15년 상환) ‘농촌주택개량자금’을 지원했고, 지난해는 연이율을 2.7%로 낮추고 1가구당 6천만 원까지 자금 지원을 늘리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년 이내에 991.736㎡(300평) 이상의 땅을 소유하거나 빌려 농사를 지어야한다’는 조건을 위해 별도의 영농단지도 조성했다. 이런 파격적인 조건과 주변의 선암계곡, 사인암 등 수려한 자연환경까지 더해지면서 도시 젊은층의 귀농을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뉴타운’이 옛 단양이 간직한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30~40대 젊은 귀농인의 완전한 정착을 이뤄 옛 것과 새 것이 어우러진 ‘신구조화’의 혜택과 ‘온고지신’의 새로움을 가져올지는 미지수다. ‘뉴타운’을 돈 많은 도시 사람의 별장 정도로 생각하는 현지인의 시각과 아직 ‘뉴타운’ 일부 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건물 하자 문제 등 넘어야할 산이 많다.

여러 문제와 지적에도 ‘뉴타운’을 통해 옛 단양의 왁자지껄했던 모습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고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은 여전히 버릴 수 없는 희망이다. 일부 30~40대 젊은 귀농인의 발길을 옛 단양으로 이끌었고, 또 이들이 이곳에서 새 터전을 마련해 밝은 농촌의 미래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강주석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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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단양이 수몰되고 신단양으로 사람들이 오면서 믿었던, 아니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꿈은 ‘관광도시’다. 정부는 충주댐을 건설하면서 단양 사람들에게 호반 관광도시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민선 군수 6대를 거치는 동안 군정 목표나 정책 기조에 ‘관광’이 빠진 적이 없다. 단양이 관광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수치상으로도 나타난다.

1985년 단양을 찾은 관광객은 194만 명이었으나 2014년 통계에는 926만 명으로 집계됐다. 인구는 반토막 났지만 관광객은 5배가량 늘어나 지속성장을 기록했다.

신단양 이주 통계 인포그래픽

관광 수요를 생각하면 단양의 여건은 나쁘지 않다. 경북이 도청 소재지를 오는 10월 안동·예천으로 옮긴다. 단양까지 차량으로 1시간 이내면 도달하는데, 저수령에 터널이 뚫리면 30분으로 단축된다. 충청내륙고속화도로가 완공되면 세종·통합 청주시와도 가까워진다. 청주공항을 이용하는 외국인을 단양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충주에 건설되는 기업도시와 첨단산업단지, 원주에 들어서는 혁신도시와 기업도시도 장점으로 다가온다. 중앙고속도로, 동서고속도로를 감안하면 인근에 수백만 명의 잠재적 관광수요가 발생한다. 거주자는 인근 도시로 빠질 수 있지만, 단양의 관광 수요는 늘어난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단양군은 요즘 중앙선 복선화 이후 남는 폐철도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데 지혜를 모으고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한국관광100선의 소백산국립공원을 당초 경북 영주로 표기했으나, 단양군의 노력으로 충북 단양으로 병기했다. 단양군은 다자구할머니, 역동 우탁, 삼봉 정도전, 하동산 스님, 옥소 권섭, 두향 이야기 등 지역 무형자산을 활용한 스토리텔링 사업도 하고 있다.

단양 토박이인 류한우 군수는 단양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체험형 관광에서 능동적 의미의 참여형 관광지로 탈바꿈해야 한다며 농촌·농업·농민과 관광을 결합하는 프로그램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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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댐 수몰 이후 신단양으로 이주한 지 올해로 꼭 30년이 됐다. 단양 사람들은 지나간 1세대에 대해 아쉬움을 갖고 있다. 단양 전체 인구가 줄고, 옛 단양에 남은 사람들의 삶도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무엇이 미래 단양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신단양 이주 30년, 오래된 미래를 열다’ 기획취재팀은 단양지역 각계 인사들과 함께 단양 발전을 위한 미래 동력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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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ff
PM 김정미
취재 이보환·김정미·엄기찬
자료수집 송창희·정구철
촬영 김정미·엄기찬
도움 유지상 충북향토사협의회 부회장, 조선희 단양군의회 부의장, 장지홍 단양군지역사회복지협의체 공동대표, 김중환 신단양지역개발회장, 장익봉 단양군 하천팀장, 조태근 단양군 단성면 주민(전 단양군의회 의원), 윤수경 향토사학자(전 단양군의회 의장), 김순희 단양미술협회장, 강주석 귀농인, 김종섭 사진작가, 단양군청, 단성면 상방리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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